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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청렴한 인물을 찾아서8 - (율곡이이)
작성자 김명희 등록일 13.10.28 조회수 284

율곡 이이
선비를 일깨우는 큰 선비

 

 

 

율곡은 23세 때에 도산서원을 찾아 58세의 노학자 퇴계를 만난다. 희대의 두 학자는 가슴을 열고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인생을 토론했다. 율곡이 먼저 퇴계의 학문 연원이 바로 공자와 주자에서 흘러왔다는 높은 찬사의 시를 올려바치자, 퇴계가 답을 한다.

 

병이 들어 문을 닫아 봄이 옴을 몰랐는데

그대 오니 마음이 상쾌하게 열렸네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이제 알았으니

공경스럽게 몸 갖지 못함이 부끄럽네 …(중략)

  

 

퇴계는 이틀 동안 함께 자고 묵으면서 긴긴 토론을 계속하여 율곡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가 없음을 알았노라”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율곡은 퇴계를 자주 뵙지는 못했으나 일이 있을 때마다 편지로 퇴계의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퇴계는 친절한 답변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35세 나이 차를 뛰어넘어 돈독한 관계를 이루었다.


율곡과 퇴계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다. 두 사람은 이기론(理氣論)에 대한 미묘한 견해 차이로 퇴계는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율곡은 기호학파의 종장이 되었다.


퇴계는 일찌감치 벼슬길에서 물러나 후학 양성에 몰두했지만, 율곡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정치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학문과 성현에서 배운 것으로 세상을 개혁함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율곡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높은 수준의 학문 경지와 수준 높은 정치가의 반열에 오른 분으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흑룡이 하늘을 나는 신사임당의 태몽

 

율곡의 고향은 파주 임진강변의 율곡리다. ‘율곡’이라는 호는 ‘밤골’이라는 고향마을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벼슬은 감찰)는 강릉에 살던 사임당 신씨에게 장가들었다. 사임당 신씨의 친정어머니 이씨가 거처하던 곳이 그 유명한 ‘오죽헌’이라는 신씨네 별채였다. 율곡은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이 ‘몽룡실’이고 아이 때의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율곡은 외할머니 이씨의 지극한 사랑과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 신씨의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벌써 깊었으니

시인묵객의 회포 무궁하구려

길게 뻗은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 받아 붉구나

산등성이에는 외로운 달이 떠오르고

강 위에는 만 리의 바람이 흘러가네

변두리에서 나는 기러기 어디메로 가는고

울음소리 저문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이 시는 율곡이 8세 때 공부하다가 바람 쐬려고 정자에 올라 무심코 읊은 시다. 13세에 진사과 초시에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수준 높은 철학논문을 지어 합격했고, 13세 이후로 2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에 나가기까지 그는 아홉 번의 시험에 모두 합격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22세에 곡산 노씨와 결혼한 율곡은 처가인 황해도 해주도 출입하는데 해주의 석담(石潭)에는 구곡(九曲)의 경치가 아름다운 명승지가 있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율곡은 그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그곳에 은병정사(隱屛精舍)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칠 서재이자 만년에는 은퇴할 장소로 여겼다.


29세에 장원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이조, 호조, 병조판서에 대제학을 역임하고 정승 다음의 우찬성에 올랐으나 반대파들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을 펼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조선 학술사의 명저’성학집요’

 

파주 임진강변의 화석정. 율곡이 8세 때 공부하다가 바람 쐬던 곳으로 무심코 읊은 시가 전해진다.


40세 되던 해, 율곡은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평생의 대작인 저서를 임금께 바친다. 이 책은 율곡이 경서와 사서에서 학문과 정사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말들을 골라 뽑아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저작한 책이다.


5편으로 구성된 그 책을 받아본 선조가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내용만 보아도 그 책이 지닌 내용과 가치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율곡은 49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한 해 전인 48세 때는 참으로 바쁘고 분주하게 보냈다. ‘시무 6조’의 상소를 올려 시급히 해결할 문제를 진언했고,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개혁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했다. 이 무렵의 10만 양병설의 주장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이와같이 율곡은 학문을 연구하고 성현을 배워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업을 성취할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충분하게 설파하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율곡의 높은 정치적 경륜은 후세의 많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산림에 숨어서 벼슬을 기피하던 학자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아무런 능력 없이 과거에 급제하여 녹이나 받아먹는 벼슬아치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오죽헌, 화석정, 자운서원 가이드


 강릉 오죽헌은 조선 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이곳 몽룡실에서 율곡이 태어남으로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 사랑채, 어제각, 율곡기념관이 있다.

 

 오죽헌 관리사무소 033-640-4457

 자운서원은 율곡을 모시는 서원으로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 동문리 자운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1615년(광해군 7년)에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워졌고, 팔작지붕으로 된 6칸의

 사우(祠宇), 묘정비, 율곡과 부친의 묘소, 율곡기념관 등이 있다.

 

 자운서원 관리사무소 031-958-1749

 화석정은 자운서원 근처 임진강변에 있다. 율곡이 8세 때에 이곳에서 쓴 시가 정자 안에 걸려 있다. 정자 앞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의 유장한 흐름이 장관이다.  

 

출처-국민권익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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