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청렴한 인물을 찾아서7 - (이원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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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희성 | 등록일 | 13.09.27 | 조회수 | 407 |
가난뱅이 재상 화려하게 부활하다.
광명 오리 이원익 사적지를 찾아서
“세상사람 중에 형제가 화목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부잣집에서 그러한데, 이것은 재물이 있으면 다툴 마음이 생겨 천륜을 상하게 하니, 재물이 바로 빌미가 되는 것이다. 자손들은 절대로 옳지 못한 재물을 모으지 말고 불인(不仁)한 부를 경영하지 마라. 다만, 농사에 힘써 굶어죽는 것을 면하면 옳을 뿐이다.”. 오리 이원익 선생이 남긴 유서 中에서.
임금이 늘 가까이하고자 했던 신하
이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잘 나와 있다. 스물 한 번이나 영의정의 사직서를 받아야 했던 인조 임금은 결국 “지금 국가의 일로 말한다면 결코 윤허할 수 없다”면서 “다만 생각하건대 경이 오랜 병중에 있으면서 해직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한다면 필시 병을 조리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기에 부득이 억지로라도 경의 뜻에 부응해 주어야 하겠다”며 청을 들어주었다.
두 칸짜리 초가집만 남기고 간 재상
충현박물관 앞마당을 기준으로 왼편의 작은 계단을 타고 오르면 문패가 달린 종택이 보인다. 이원익 3대 직계손의 문패로 1960년대 말 13대 직계후손인 이승규 교수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이원익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해왔다. 이 종택은 ㄱ자형의 안채와 ㅁ자형의 행랑채가 배치되고, 그 옆에는 ―자형 사랑채가 달린 형태로, 20세기 초 경기 지역 상류 주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종택을 나와 작은 문을 하나 건너니 경기도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된 관감당이 나온다. 이 건물은 충현박물관 경내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건물로 이원익 선생의 무소유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이원익 선생이 말년에 보냈던 사저로 인조임금이 하사한 5칸짜리 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인조 9년(1623년) 정월 10일, 임금이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 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관감당 앞에는 이원익 생전에도 있었던 약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와 ‘탄금암’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측백나무 밑자락에 놓인 평평한 생김새의 탄금암은 이원익이 살아 있을 때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그리 지었다고 한다. 관감당 뒤편으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인 ‘오리영우’가 있다. 내부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인 이원익의 영정이 있는 오리영우는 숙종 19년(1693년) 10월에 건립되었다. 그 왼편으로는 충현서원이 위치해 있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너른 터 위에 자리 잡은 이원익 선생의 사적지는 어찌 보면 궁궐처럼 화려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가난했던 재상으로 알려진 이원익 선생과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화려함은 이원익 선생이 남긴 자취가 아니다. 선조의 숭고한 정신문화를 후대에도 널리 알려야 한다는 뜻에서 후손들이 충현박물관을 마련한 것이다. 각계 인사들의 자문을 받아 재단법인 충현문화재단을 세우고 박물관을 지어 사적지를 관리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평생을 두 칸짜리 집으로도 만족하며 누구보다 청빈을 몸소 실천하던 이원익 선생이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사람 앞에 나서며 멋쩍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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