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외초등학교 로고이미지

청렴남외교육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역사속 청렴한 인물을 찾아서4 - (다산 정약용)
작성자 김은득 등록일 13.06.14 조회수 376

영원한 스승이 머무는 다산유적지를 찾아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와 전라남도 강진군 두 곳에서 만날 수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유적지는 다산이 태어난 곳이자 유배 생활을 마친 뒤 노년을 보내고 생을 마감한 곳이며,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의 유적지는 다산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곳이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다산의 유적지를 즐겨찾는 이유는 그가‘선비다움을 실현한 영원의 스승’이었으며‘전방위적 지식경영인’‘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현실개혁주의자’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강진 땅에서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을 만나다

 

다산은 마흔 살이 되던 1801년부터 쉰일곱 살 때인 1818년까지 강진 땅에서 유배시절을 보냈다. 스물두 살에 초시에 합격, 성균관 유생이 되고 홍문관 수찬, 경기도 암행어사,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낸 다산이 유배를 당한 이유는 천주교 박해로 치장된 정치적 사건인 1801년의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죽임을 당했고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다.


먼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동문 밖 밥집 노파가 내준 집에‘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이고 4년 간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사의’란‘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과묵한 말씨, 무거운 행동’을 뜻한다. 이 기간 중 <상례사전>의 일부와 2천자문인 <아학편훈의> 등을 집필했다. 1805년 겨울에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으로 이주, 주역을 연구했다. 1806년 가을부터는 제자 이청자는 학래의 집에서 살았다. 강진 유배생활 8년째인 1808년 봄, 마침내 지금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진만을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의 천일각>           다산 생가에 걸린 여유당 현판(경기도 남양주)          

 

 

귤동마을 숲 속에 위치한 다산초당으로 가기 전 여행객들이 필히 들러야 할 곳이 다산유물기념관이다. 다산의 영정, 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수원화성 건립 시 다산이 발명한 거중기 모형도 실내에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기념관 관람을 마친 여행객들은 발걸음을 다산초당으로 돌린다. 숲길 초입에서는 다산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전환기에 다시 보는 해설 목민심서>를 팔기도 한다. 귤동마을을 품은 만덕산(409m)은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으로도 불렸으며 정약용의 호 다산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다산의 사상이 완성된 곳‘다산초당’

 

소나무, 대나무, 동백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한참 올라가면 서암, 다산초당, 동암, 천일각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다산초당은 해남 윤씨 집안사람인 귤림처사 윤단의 산중 별채였다. 다산의 모친이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 귤동마을 해남 윤씨들은 다산의 외가쪽 친척들이었으니 다산을 자신들의 초당으로 초빙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정약용은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초당의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자신은 동암에서 주로 기거하며 독서를 하고 집필을 했다. 서암은 윤단의 아들과 손자들을 포함한 제자들의 거처로, 초당은 교실로 활용됐다.


다산초당이라는 안정적 거처를 얻게 된 다산은 이곳에서 유배가 풀릴 때까지 머물며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집필을 완성하거나 초고를 만들었다. 목민심서는 1818년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서 완성시켰고 흠흠신서는 1819년에 완성됐다. 목민심서 서문에서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자의 학은 반은 수신修身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牧民, 즉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목하는 자들은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고 어떻게 목민해야 할지를 모른다. (중략) 이에 우리나라의 제반 역사, 자집과 여러 서적을 통해 옛날 사목들이 목민한 자취를 뽑아 차례로 편성했다. (중략) 또 이것을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목민의 마음은 있으나 몸소 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위정자들과 관리들, 경영인, 지식인들은 목민심서를 가까이 놓아두고 가슴으로 새겨 읽는 것은 아닐까.
다산이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켰던 공간인 다산초당은 1958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해놓았다.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다산의 손길이 닿았던 정석丁石, 다산이 손수 새긴 글씨, 다조차 부뚜막, 약천, 연지 등은‘다산 사경’으로 꼽힌다.
책을 읽다가, 왕성하게 집필에 몰두하다가 다산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 산책을 즐겼다.

 

초당의 동쪽 산마루지금의 천일각 자리에서 흑산도로 귀양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기도

했고 내친 걸음에 백련사까지 찾아갔다. 천일각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강진만 바다는 물론이고 완도 쪽 다도해도 시야에 들어온다. 만덕산 백련사에는 혜장선사1772�1811가 주석하고 있었다.

 

다산은 자신보다 열 살 연하의 혜장선사와의 만남을 통해 토론을 나눴고 유배의 아픔을 달랬다. 또한 차를 알게 됐고 초의선사1786~1866와도 교류하게 됐다. 오늘의 여행객들도 다산과 혜장선사가 나란히 걸었을 초당과 백련사 간 숲길을 거닐고, 만덕산 등성이를 서너 굽이쯤 돌아가며 두 위인의 우정을 생각하고 사유의 교류를 짐작해본다. 두 명소 간의 거리는 도보로 40분이 소요된다.


백련사 주변에는 차나무가 많고 동백나무도 많이 자란다. 3천여 평의 산비탈에 빼곡히

 

 

자리 잡은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은 수령이 3, 4백년을 족히 넘는다. 만경루, 대웅보전, 칠성각, 응진당 등을 답사하고 동백숲도 감상한 후 시간 여유가 있으면 요사채 아래의 선다원 찻집에 들러 백련차나 작설차, 솔잎차 한 잔 마시고 풍경소리를 감상하거나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여유에 빠져본다.

 

다산의 문학관을 느끼고 싶다면 남양주 다산유적지로

 

한편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유적지에는 생가‘여유당’과 묘소, 사당, 동상, 기념관, 문화관 등이 있어 한 자리에서 다산의 일생을 만나보기에 좋다. 다산이 살던 집 뒤로는 그의 묘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 팔당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문화관에는 아들에게 보낸 다산의 글이 적혀 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시가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 것을 밉다 하며 선을 전장典掌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는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문학관이 잘 드러나 있다. 요즈음의 문학과 얼마나 다른가. 무조건 옛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세상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팝콘이나 껌보다 돈 주고 사기 아까운 문학이란 것과 다산의 말이 너무 거리가 먼 것에 왜 마음이 쓸쓸해지는지 모르겠다.
다산은 한때나마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뜻을 펼칠 수 있는 시절을 보냈다. 비록 살아생전 영화를 다 누리지는 못했어도 사후에 다산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은 인물도 드물다. 먼저 깨닫고 좀 더 지혜로운 자로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야 할지 다산은 너무 잘 알고 부지런히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전글 청렴 만화 4회(박순)
다음글 역사속 청렴한 인물을 찾아서3 - (맹사성)